[구례일보 신명철 선임기자] 1876년 강화도 조약과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 및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등을 계기로 조선은 일본, 청나라,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는 침탈을 겪게 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각종 이권을 빼앗기고, 청나라, 러시아, 일본 등의 조선과 인접한 열강 국가의 군대들은 조선을 밥 먹듯 드나들게 됐다.
특히 일본 제국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을 독점하게 되고, 급기야 1905년의 을사조약 등을 거쳐 기어이 1910년에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박탈함으로써 한국, 당시 조선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됐다.
독립유공자 공적정보는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와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토대로 독립유공자 관련 정보를 작성하였습니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1949년부터 시작된 정부포상 결정문으로, 최소 70여년 전의 일제강점기 판결문 등 근거자료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한자가 많이 쓰여 있습니다.
이에, ‘한글(한자)’ 표기로 개선된 별도의 공적조서를 제공하고 한자어 등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를 바탕으로 독립운동 기간의 공적 및 주요활동의 역사적 사실을 전문가의 집필을 통해 책으로 발간된 내용입니다.
따라서 공적근거 자료 외 내용이나 책 발간(공적심사) 이후 학술 연구 등을 통하여 추가 확인된 내용은 수록되어 있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1,강정택,姜正澤,1866 ~ 1924,3.1운동,2010 대통령표창 (생년월일1866-02-14), (사망 1924-06-27), 전라남도 구례 龍方 龍寺 ⇨ 전남 구례(求禮)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면사무소에 독립선언서를 게시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2,강철수,姜喆秀,1867 ~ 1924,3.1운동, 2006년 대통령표창,(생년월일1867,07`23), 사망년월일1924-07-02, 전라남도 구례 龍方 龍井 417 ⇨ 1919년 3월 2일 전남 구례군(求禮郡) 용방면(龍方面) 용정리(龍井里)에 전북 남원군(南原郡) 천도교구장 유태홍(柳泰洪)이 보낸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강철수를 비롯한 천도교인들은 그날 밤 주민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자 비밀리에 관공서 게시판 등에 독립선언서를 붙였다.
3,공성찬,孔成瓚,1877 ~ 1909,의병, 1999년 애국장, 생년월일(1877), 사망년월일(1909-09), 전라남도 구례 馬山 黃屯 ⇨ 1908년 2월경부터 김성구 의진(金聖九 義陣)의 부장(副將)으로서 부하 수십명과 함께 전북 남원(南原), 전남 구례·옥과(玉果)·순천군(順天郡)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폈다.
4,김공현,金工鉉,1865 ~ 1935,3.1운동,2010 대통령표창, 생년월일1865-12-26, 사망년월일 1935-10-12, 전라남도 구례 內山 水基 ⇨ 전남 구례(求禮)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면사무소에 게시하는 활동을 하였다.
5,김권석,金權石,미상 ~ 1908,의병, 2014년 애국장, 생년월일1865-12-26, 사망년월일1935-10-12, 전라남도 구례 內山 水基 ⇨전남 구례(求禮)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면사무소에 게시하는 활동을 하였다.
6,김규열,金圭烈,1893 ~ 1968,임시정부,1992애족장, 생년월일1865-12-26, 사망년월일1935-10-12, 전라남도 구례 內山 水基 ⇨ 전남 구례(求禮)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면사무소에 게시하는 활동을 하였다.
7,김응삼,金應三,1886 ~ 1909,의병, 1991 애국장, 생년월일 (1886), 사망년월일1909-09-08, 전라남도 구례 마산 냉천 ⇨ 1907년 9월 15일 동지 2백 명과 더불어 동복(同福)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한편 의병을 소모(召募)하고, 군기(軍器)를 수집하여 전세를 올렸으며, 각지를 전전하며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17일 지리산 구례 화개동(花開洞)의 연곡사(燕谷寺)를 본영으로 삼아 그 일대의 적병과 교전하였다.
8.김택주.金澤柱.1855 ~ 1926.3.1운동.1995 건국포장. 생년월일1855-07-08, 사망년월일1926-04-28, 전라남도 구례 內山 官山 229 ⇨ 그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9,문동경,文同京,1907 ~ 1985,국내항일,2006년 애족장, 생년월일 1907-01-02, 사망년월일 1985-12-16, 전라남도 구례 구례 봉동 ⇨ 1928년 동양대학 경제학부 재학 당시 일제의 사회제도와 정치를 비난하는 문건을 작성하고, 연설을 하는 등 학생 청년들에게 독립의식을 강조하였다.
10,문채호,文采浩,1924~2008,광복군,1990년 애족장, 생년월일1924-11-27, 사망년월일2008-10-12, 전라남도 구례 鳳東 382 ⇨ 1945년 4월 중국 중경에 도착하여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여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光復軍總司令部 警衛隊)에 배속되어 특수임무를 수행하면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11,박경현,朴敬鉉,1859~1923,3.1운동,1993년 대통령표창 ⇨ 1919년 3월 23일 구례군 광의면(光義面) 지촌리(芝村里)에서 박해운(朴海運) 등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이튿날 3월 24일 구례읍 장터에 모인 다수의 군중 앞에서 일제의 통치를 비판하고 독립운동을 벌이자는 내용의 연설을 한 후 가지고 있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12,박성래,朴誠來,1882~미상,3.1운동,2014년 대통령표창 ⇨ 1919년 3월 전남 구례군(求禮郡) 용방면(龍方面)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군청, 면사무소 게시판 등에 부착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3,박승표,朴勝表,1899~1978,3.1운동,2022년 대통령표창 ⇨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음.
14,박주일,朴周一,1884~1952,의병, 1992년 애족장 ⇨ 1907년10월 10일(음) 참진(參陣)하여 총포 50여정으로 무장한 의병 100여명과 함께 전남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연곡사(燕谷寺)에서 유진(留陣)하며 일군과 항쟁하였다.
15,박흥래,朴興來,1872~미상,3.1운동,2010년 대통령표창 ⇨ 박흥래는 강정택과 함께 1919년3월 2일 밤 구례군 광의면과 용방면 면사무소 게시판에 독립선언서와 공약 3장을 몰래 게시하다가 붙잡혔다.
16,서유종,徐有宗,1872~1961,3.1운동,2006년 대통령표창 ⇨1919년 3월 2일 서유종을 비롯한 그곳에 모여 있던 천도교인들은 그날 밤 비밀리에 관공서 게시판 등에 독립선언서를 붙여 주민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17,신갑도,申甲道,1868~1947,3.1운동,2010년 대통령표창 ⇨ 신갑도는 임양순과 함께 구례군 외산면(外山面) 면사무소와 원촌 헌병주재소 게시판에 독립선언서와 공약 3장을 몰래 게시하다가 붙잡혔다.
18,양용환,梁用桓,1904~1943,문화운동(구례중앙교회 5대목사), 1990년 애족장 ⇨ 1937년 3월에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를 졸업하고 구례중앙교회 목사로 취임하여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키고 일제의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를 거부하다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양응인,梁應仁,1863~1908,의병, 1991년 애국장 ⇨ 1906년 11월 의병을 거느리고 구례(求禮)·광양(光陽)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1907년 구례 섬진강변에 의병 요새를 구축하여 몇 차례 적과 교전하여 적의 침입을 봉쇄하였다.
20, 왕재일,王在一,1904~1961,학생운동,1991년 애국장 ⇨ 1926년 9월, 식민지배하의 민족차별에 대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교생 장재성(張載性), 광주농업학교 박인생(朴仁生) 등과 동지가 되어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다.
21,유병기.劉秉淇,1882~1910,의병, 1977년 독립장 ⇨ 유병기 의진은 함평군 나산(羅山)을 거점으로 담양·영광·장성·창평·광주·동복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22,윤상윤,尹相鈗,1889~1959,3.1운동,1992년 대통령표창 ⇨ 황전면(黃田面)과 구례군(求禮郡) 구례읍내 각 요소에 독립선언서의 취지와 내용을 널리 전파하는 책임을 지고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23,이상암,李相岩,1906~1949,국내항일,2005년 애족장 ⇨ 1929년 구례청년동맹(求禮靑年同盟) 집행위원장을 맡아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24,이승호,李承浩,1890~미상,국내항일,2006년 애국장 ⇨1919년 9월 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라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국내에서 활동하였다.
25,이종춘,李鍾春,1854~1931,3.1운동,1995년 건국포장 ⇨ 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26.이춘경,李春京,1882~미상,의병, 1995년 애국장 ⇨ 민종식(閔宗植) 의진에 가담하여 충남 남포(藍浦)·간제(干堤)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27,임양순 林良淳,1865~미상.3.1운동,2010년 대통령표창 ⇨ 전남 구례(求禮)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면사무소와 주재소에 독립선언서를 게시하는 활동을 하였다.
28,임현주,林顯周,1858~1934,의병, 1990년 애족장 ⇨ 1905년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임병찬(林炳瓚)을 중심으로 최제학(崔濟學)·고석진(高石鎭)·최학령(崔學嶺)·이용길(李容吉)·손종궁(孫鐘弓)·김태원(金泰元, 準)과 함께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거사준비를 하였다.
29,조길룡,曺吉龍,1909~1991,학생운동,1963년 독립장 ⇨ 김남철(金南哲)·이영범(李翎範) 등과 함께 뒤를 이어 교내 조직을 3개반으로 나누고 각기 반책임자가 되어 사회과학연구 등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30,천연도,千年桃,1890~1923,3.1운동, 2022년 애족장 ⇨ 1919년 3월 31일 덕과(德果)면사무소에서 면장 이석기(李奭器)가 4월 3일 식수기념일에 마을 구장들을 모아 800여 명의 주민이 만세를 외쳤다.
31,최봉기,崔鳳基,1910~1977,학생운동,1993년 건국포장 ⇨ 동조시위를 계획하고 같은 학교의 학생 200여명과 함께 교실을 뛰쳐나와 구속학생의 석방과 일제 타도를 외치며 광주형무소로 시위 행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32,최상선,崔相先,미상~1908,의병, 2014년 애국장 ⇨ 1908년 6월 전남 구례군(求禮郡)에서 의병장으로 부하 2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 순국하였다.
33,한규순,韓圭順,1876~1908,의병, 1990년 애국장 ⇨ 1907년 9월 11일 구례 연곡사(燕谷寺) 전투에서 어깨에 부상을 입고 구례 간전(艮田)의 자택으로 돌아와 잠시 요양하였다.
34,허탁, 許鐸, 1857~1925,3.1운동, 2010년대통령표창 ⇨ 구례(求禮)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면사무소에 게시하는 활동을 하였다.
35,황원,黃瑗, 1870~1944, 국내항일, 1990년 애족장 ⇨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에 통분하여 자결 순국한 친형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사인(死因)을 일제가 병사(病死)로 왜곡하려하자 이를 바로잡아 형의 유지(遺志)를 지켰다.
36,황현, 黃玹, 1855~1910,계몽운동,1962년 독립장,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후에 청국의 적극간섭정책 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했으므로 부패한 관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그는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네 수(首)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리며 잊지말고 정신을 지켜나가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