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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원 (전)구례군문화원장, 구례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2026-05-24 17:09 | 입력 : 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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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求禮)와 가야문화(伽倻文化)

                                              

 흔히들 구례(求禮)지역은 전라도(全羅道)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삼한(三韓)시대에 마한(馬韓)의 영역에, 그리고 삼국(三國)시대에는 백제(百濟)에 속하고 있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실제로 구례지역은 체계적이고 학술적이며 전문적인 연구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단정적으로 부정하기도 쉽지 않지만, 간헐적인 조사나 유물의 발굴, 발견에 따르면 마한(馬韓)이나 백제 영역이라고 확정 지을만한 증거가 부족한 형편이다. 오히려 가야(伽倻)와 관련이 있는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마한(馬韓)은 54개의 소국(小國)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구례지역도 마한을 구성했던 소국에 속해 있었거나, 읍락(邑落)이 있었을 것으로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추정되어 왔다. 그런데 마한(馬韓)의 소국들은 지역마다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百濟)에 쉽사리 정복되지 않았다. 전라남도 지역의 마한 세력에 대한 백제의 정복활동(征服活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때 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정복활동의 일환으로 전라남도 지역이 백제에 편입되었다고 하나, 당시의 전쟁은 약탈 성격을 띠는 전쟁이 주(主)이기 때문에 백제가 이 지역을 침입하였다고 해서 곧바로 이 지역이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친 후 나중에야 점진적으로 백제의 영역(領域)으로 되었을 것이다. 전라남도 지역에는 백제시대에 모두 12군(郡) 45현(縣)이 소속되어 있었다. 구례(求禮)는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이전에는 구차례현(仇次禮縣)으로 불렸는데, 즉 구차례현도 백제의 45개 현 가운데 하나였다. 이때 구차례현은 욕내군(欲乃郡)(곡성군의 옛 이름)의 영현(營縣)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영속 관계의 내용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구차례현에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였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내용들이 삼한시대(三韓時代)에서 백제시대를 거치는 동안의 구례와 관련된 것들이다. 즉 구례는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 삼국시대에는 백제(百濟), 그리고 신라(新羅)에 병합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구례지역에서는 마한(馬韓), 백제(百濟)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구례군 구례읍 봉동리,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의 석실분(石室墳)은 백제계(百濟系) 석실분으로 추정, 약 6~7세기) 오히려 가야(伽倻) 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이 훨씬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렇듯 역사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가야의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시기에 구례지역은 가야(伽倻)의 영향력 또는 가야문화(伽倻文化)와 직, 간접의 영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가야(伽倻)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낙동강(洛東江) 유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기원후 2세기 무렵에는 12개의 소국(小國)이 나타났고 3~4세기 경에는 김해(金海) 가락국(駕洛國) 중심의 전기 가야연맹(前期 伽倻聯盟)이 번성 하였으며 5~6 세기경에는 고령(高靈) 대가야국 중심의 후기 가야연맹(後期 伽倻聯盟)으로 이어져 왔다. 특히 4세기 전기 가야연맹은 중국 남조(南朝), 백제(百濟), 왜(倭)를 연결하는 국제 교역망(交易網) 속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왜(倭)와 연합하여 신라(新羅)와 경쟁(競爭)하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고구려(高句麗)에게 구원을 요청 하였다. 이에 따라 서기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군사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하한 고구려군은 임나가라(任那加羅), 안라국(安羅國) 등을 격파하며 전기 가야연맹을 해체 시켜 버렸다. 이때 가야소국(伽倻小國)들이 모두 망한 것은 아니지만 성주, 창녕, 부산 등 낙동강 동쪽 지역의 소국들이 신라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낙동강 하구의 주요 가야 세력들은 초토화되었다. 이에 전기(前期) 가야연맹의 중심지였던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가야 소국들의 주민들이 흩어져 경상도 내륙 지방과 일본열도 등으로 이주(移住) 하였다. 그리하여 경북 고령, 합천 등을 중심으로 한 후기(後期) 가야연맹이 출현하게 된다.(5세기 이후) 

 고령의 반파국(伴跛國)은 5세기 후반에 대가야(大伽倻)라 칭하며 13개의 소국(小國)을 거느린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盟主國)이 되었다. 대가야는 479년에는 중국 남제(南齊)와 교류하였으며 신라를 공격하는 고구려 군대를 백제와 함께 연합하여 막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대가야(大伽倻)는 6세기 초에 기문(己汶: 남원, 임실의 옛 지역)과 대사(帶沙:하동의 옛 이름)지방을 둘러싸고 백제와 대립하여 기문(己汶)을 빼앗기고 대사(帶沙)는 겨우 방어하였다. 그리하여 후기(後期) 가야연맹은 540년에 고령의 대가야국과 함안의 안라국(安羅國)을 중심으로 한 남북 이원 체제로 분열되었다. 그러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가야연맹 전체의 독립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550년경에 백제에게 반(半) 복속되었다. 가야연맹은 554년에 백제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관산성(管山城) 전투에 나섰다가 신라에게 대패하였으며 562년에 신라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그 후 약 100년 후인 660년에 백제도 신라와 당(唐)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가야의 성립과 멸망까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이 시대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遺蹟)은 고분(古墳)인데, 이 시기에 발견되는 고분에는 대형옹관묘(大形甕棺墓)와 석실(石室)이 있다. 구례지역에서 대형 옹관고분(甕棺古墳)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93년 구례지역 유적 조사를 통해서 구례군 광의면 대산리 유적지와 구례군 마산면 갑산리 유적지에서 옹관편(甕棺片)이 수습되어 그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여러 고분(古墳)에서 많은 토기가 수습되었는데 이들 토기(土器)의 경우 다리 부분에 넣는 투창(透窓)이 상하 일렬로 배치되는 등, 가야(伽倻) 토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구례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는 청동기(靑銅器) 문화로서 고인돌과 유물 산포지 등의 유적들이 조사되었다. 이들 유적의 분포를 보면 섬진강(蟾津江)변의 충적지대와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와 형성된 선상지 지형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 한정된다. 한편, 철기(원삼국:原三國)시대는 기원전 1-2세기에 시작되어 기원후 3-4세기경의 고분(古墳)시대 시작 전까지의 시기(時期)를 말하며 구례에서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유물 산포지가 있는데 주로 섬진강과 지리산 선상지 등으로 청동기(靑銅器)문화 유적지와 겹쳐있어 문화의 흐름이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유적으로는 구례읍 봉서리 유적, 구례군 대산리 유적, 구례군 갑산리 유적, 구례군 냉천리 유적, 구례군 사도리 유적, 구례군 용두리 유적, 구례군 죽마리 유적, 구례군 월전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물 산포지의 출토된 유물들은 시대적으로 보면 대부분 청동기, 철기시대의 것이며, 유물 산포지는 군(郡)을 가로지르는 섬진강(蟾津江)과 그 지류인 서시천(西施川)과 주변 평야(平野)로 한정되어 있다. 

 구례의 고분(古墳)은 분구(墳丘)를 가진 무덤으로 적석총(積石塚)과 같이 돌로 만들어진 것도 있으나 대개는 흙을 쌓아 만들었다. 분구의 형태는 원형(圓形), 방형(方形),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고분은 기원후 3-4세기경 고대국가 체계가 확립되면서 지배층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거대한 분구를 축조하게 된다. 구례에서는 옹관고분(甕棺古墳)의 존재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광의면 대산리 유적, 마산면 갑산리 유적 등지에서 대형 옹관편(甕棺片)이 수습되고 있어, 보다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그 성격이 규명되리라 본다. 

 구례에서는 정식적인 고분(古墳)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고분의 성격이나 연대를 정확히 예측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토광묘(土壙墓) 등으로 추정되는 유적에서 유물이 수습되어 개략적이나마 성격을 추정할 수 있는데, 광의면 대산리, 토지면 용두리 등지에서 수습된 유물들을 보면 고배(高杯), 장경호(長頸壺), 단경호(短頸壺) 등이 유사성을 가지고 있고 가야 토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구례지방이 가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남원지방과 같이 지역적으로 접경지역에 속해 있다는 것은 일정 시기의 문화 유입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으며, 문화의 유사성 또는 동질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나아가서 구례 지역의 고분이 지정학적으로 가야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구례의 고분으로는 구례군 구례읍 봉동리 고분(古墳),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고분(古墳), 구례군 광의면 대산리 고분군(古墳群), 구례군 토지면 용두리 고분군(古墳群) 등이 있다.

 이러한 유물(遺物)이나 고분(古墳)들은 아직 정식 발굴 조사나 수습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유물이나 고분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토광묘(土壙墓) 등으로 추정되는 유적에서 유물이 수습되어 개략적이나마 성격을 추정할 수 있는데, 광의면 대산리, 토지면 용두리 등지의 유물 산포지나 고분 등에서 수습된 유물을 보면 고배(高杯), 장경호(長頸壺), 단경호(短頸壺), 대부호(臺附壺) 등이 있는데, 이들 유물들은 주로 남원이나 인접한 경상도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유물들과 유사하여 백제계가 아닌 가야적(伽倻的)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구례지역이 이웃 남원 지역과 지역적으로 접경지역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남원부(南原府)에 오랫동안 속해 있었으며, 고대의 남원 지역은 대가야(大伽倻)의 중요 거점 지역의 하나였다. 이러한 사실은 구례지역의 유물이나 고분은 가야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며, 지리적(地理的)이나 시기적(時期的)으로 가야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후기가야연맹의 중심지였던 대가야(大伽倻)인 경북 고령 지역, 이곳에는 거대 고분군(古墳群)만 수십 개, 그 외 보통 고분(古墳) 천여 개가 형성되어 있다. 1977년에 거대 고분 중 하나인 44호 고분이 가장 먼저 발굴되었다. 이 고분에서는 35명 이상의 순장자(殉葬者)의 유골 및 흔적이 발견되었고, 수많은 토기와 철기 제품, 금동관 등이 수습되어 왕릉(王陵)급 고분으로 학계에서 평가하였다. 또한 30호 고분(古墳) 발굴에서는 구례지역과 가야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바로 통형기대(筒形器臺)이다. 지배층의 의례(儀禮)용으로 사용된 이 원통형 토기는 가장 독특한 대가야 고유의 도질토기(陶質土器)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주로 고령(高靈) 지역에서만 제작되고 발견된 것으로만 알려진 이 토기가 실제로 고령을 벗어난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즉, 고령을 비롯해 거창, 장수, 임실, 구례, 하동, 함양 등에서 출토되었다. 이는 아마도 대가야(大伽倻)의 지배자가 각 지역의 수장(首長)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원통형 토기의 출토 지역은 대가야의 영역, 또는 그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구례지역에서는 학술적인 발굴, 유물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다른 지역의 발굴 조사에 의하면, 이들 지역의 지배자 무덤에는 반드시 대가야(大伽倻)에서 만든 통형기대(筒形器臺)를 포함한 다수의 유물들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구례지역에서의 이 의례용 통형기대(筒形器臺)의 발견은, 기록에는 없지만 구례지역과 가야와의 관계는 단순한 문화적 교류가 아닌 또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가야(伽倻)라는 나라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지방 일대에는 가야(伽倻)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소국(小國)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伽倻)의 역사가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은 가야에 대한 역사의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례(求禮)와 가야(伽倻)의 관계도 알려진 것이 없기에 유추(類推)할 수밖에 없다. 가야(伽倻)는 약 700년에 걸쳐 존재했던 소국(小國)들의 연맹(聯盟)으로서 5세기를 기점으로 전기(前期) 가야연맹과 후기(後期) 가야연맹으로 나누어진다. 전기 가야연맹 시기부터 구례지역은 마한(馬韓)이나 백제(百濟)보다 가야(伽倻)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구례군 광의면 대산리 유물 산포지 와 마산면 갑산리 유물 산포지 등에서 수습된 유물들이 가야계 토기들의 특징을 갖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전기 가야연맹이 김해 가락국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洛東江) 중하류 지역이었기 때문에, 고구려(高句麗) 군(軍)에 의한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와 신라(新羅)의 낙동강 중, 하류 지역의 강점(强占)은 낙동강을 이용한 가야의 해상진출(海上進出)은 사실상 봉쇄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後期) 가야연맹은 낙동강 하구가 신라에 장악되어 해상진출이 막히자, 섬진강을 이용한 해상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 하게 되었다. 당시 후기 가야연맹의 주요 소국(小國)들을 보면 대가야(大伽倻, 가라국: 경북 고령), 거열(居烈: 경남 거창), 기문(己汶: 전북 남원), 졸마국(卒痲國 : 경남 함양), 걸손국(乞飡國: 경남 산청), 다라국(多羅國: 경남 합천), 대사국 (帶沙國 : 경남 하동), 사타(娑陀: 전남 순천), 모루(牟婁:전남 광양), 달이 (達已: 전남 여수)등이 있었다. 즉 경.남북 내륙에서 섬진강 중. 하류를 따라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만큼 대가야로서는 해상진출을 위한 섬진강 교통로(交通路)의 확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였을 것이다.

 대가야(大伽倻)는 기록에 의하면 서기 479년 중국 남제(南齊)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는데, 남제(南齊)는 양자강(揚子江) 이남에 있었다. 따라서 경북 고령에서 중국(中國) 양자강(揚子江)까지의 행로를 보면 고령에서 거창, 합천, 함양, 남원(운봉)의 육로(陸路)를 거쳐 섬진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 하동에서 남해(南海)로 가서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황해(黃海)를 건너고 다시 중국 연안을 따라 남하(南下)해서 양자강 하구에 도착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고령에서 남원까지 육로로 와서 섬진강에서 배를 타고 하동으로 갔다면, 중간에 배를 탈 수 있는 곳이 구례(求禮)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남원에서 구례의 산동을 넘어 광의, 마산, 토지 그리고 용두포구에서 배를 탔을 것이라는 가정(假定)이 가능해진다. 구례(求禮)에서 가야계(伽倻系)로 추정되는 유적지도 이 경로(徑路)를 따라 위치하고, 유물 또한 이 경로를 따라 발견되어 이 가정(假定)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구례는 대가야 지역의 중요한 대외 무역 교통로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기록에는 없지만 후기(後期) 가야연맹, 즉 대가야의 입장에서 보면 구례지역이 해상진출을 위한 교두보(橋頭堡)로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구례지역에서 통형기대(筒形器臺)의 출토는 대가야가 해상진출을 위한 교통요로(交通要路) 상에 있는 여러 집단을 거점 지역으로 확보하면서 정치적인 동맹관계, 또는 상하관계를 맺은 지역 중의 하나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섬진강을 거쳐 남해의 바다로 진출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여겼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렇듯 구례지역은 단순한 가야문화(伽倻文化) 권역이 아닌 정치적(政治的)으로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해석은 여러 정황상 추정할 뿐, 명확한 관계는 알 수 없다. 따라서 구례지역(求禮地域)과 가야(伽倻), 또는 가야문화(伽倻文化)와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와 유물, 유적의 발굴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며 앞으로의 과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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